과학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과학세상 2023. 4. 17. 20:14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이 끝나고 재판을 마치면서 이 말을 했다는 일화는 그의 과학적 진리 탐구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일화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태양 중심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했고, 망원경 발명과 천체 관측 연구를 통해 별이 넓게 보인다는 가설을 반증했으며, 행성 표면이 특정 패턴으로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는 등 인류의 천문학적 지식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갈릴레오 갈릴레이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년 2월 15일 ~ 1642년 1월 8일)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다. 그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피사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빈첸초 갈릴레이는 유명한 류트 연주자로 음악 이론에 관한 중요한 연구를 남겼다. 과학 혁명의 리더로서 요하네스 케플러와 동시대 인물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반박하며 교황청을 비롯한 종교계와 대립했다. 업적으로는 망원경을 개량해 관측한 것, 운동 법칙을 확립한 것,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고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고 믿었다(당시에는 지구가 중심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등이 있다.

또한 갈릴레오는 공학, 물리학, 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기울어진 평면의 운동, 중력, 기압, 진동 등의 문제를 연구했다. 이러한 연구들은 현대 과학의 기초가 되는 이론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갈릴레오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 간의 충돌로 갈릴레오는 교황의 반대에 부딪혀 투옥되고, 지도자에게 강요된 자백서를 제출하고 하청업체로 내려가는 등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연구와 발견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고, 그의 업적과 영향력은 현대 과학의 발전과 인류의 지식과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갈릴레오의 태양 중심설(지동설)

태양 중심설은 천문학에서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도는 천체 중 하나라는 이론이다. 이는 지동설이라고도 불리며 현대 천문학으로 이어져 태양도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계의 중심이며, 우주에는 무수히 많은 별과 은하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하늘의 별을 관찰하던 중 산타 마리아 노벨라 대성당의 종탑에서 중심축인 지구의 자전 증거를 발견했다. 이로써 갈릴레오는 태양 중심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했다. 그는 또한 목성의 4개의 위성이 목성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것을 발견하여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것처럼 목성도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증거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발견은 당시 천문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지동설과 관련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갈릴레오의 주장은 교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의 지지자인 미디치 가문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당시 권력을 가진 교회와 대립할 수 없었다. 결국 갈릴레오는 인질로 잡혀 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고, 사후에야 비로소 그의 주장이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갈릴레오의 태양 중심설은 천문학과 과학에서 지동설을 대체하는 핵심 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그는 경사진 평면에서의 운동, 중력, 진동 등 다양한 물리 현상을 연구했다. 이를 통해 그는 현대 과학의 기초가 되는 이론의 초석을 다졌다.

 

그의 이론과 발견은 후대 연구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현대 과학의 발전과 인류의 지식과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지구에서 바라보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 천문학자이자 새로운 지식과 인식을 만들어낸 과학자였다.

 

갈릴레오의 망원경 발명

그가 발명한 망원경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도구로, 천체를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게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일부 천체가 실제로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중심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당시 지구 중심의 천문학 모델을 뒤엎는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갈릴레오가 발명한 망원경은 현대의 망원경과 달리 두 개의 렌즈를 사용하는 단순한 구조의 망원경이었다.

이를 '망원경(Telescope)'이라고 부르며 이후 망원경의 발전을 이끌게 된다. 갈릴레오는 이 망원경으로 달의 표면, 명왕성과 같은 가장 밝은 별, 유성우, 밤하늘의 은하 등을 처음 관측했다. 이를 통해 그는 태양 중심설을 지지하는 근거를 발견하게 된다. 이후 망원경은 발전을 거듭하여 광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고화질, 큰 초점거리, 넓은 시야각 등의 성능을 갖추게 되었다. 이를 통해 천체의 관측과 분석이 가능해지면서 인류의 천문학적 지식과 이해는 크게 발전하게 된다. 갈릴레오가 발명한 망원경은 10배에서 30배 정도의 배율을 가졌기 때문에 달의 표면이나 다른 천체를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달의 경우,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달의 크고 작은 구멍과 산맥을 관측하여 지구에서 관측할 때 보이지 않는 달의 지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재의 망원경은 광학, 전자, 컴퓨터 기술 등 최신 기술이 결합된 고성능 천체망원경이다. 이러한 망원경은 지상 망원경과 우주 망원경으로 나눌 수 있다.

 

지상 망원경은 지상에 설치된 망원경으로 지구 대기를 통과하는 빛을 관측한다. 이러한 망원경은 대기의 흐림, 대기 중의 수증기, 공해 등의 영향을 받을 수 있으며, 대기의 불규칙한 냉기 및 온기 흐름으로 인해 영상이 흔들리는 현상도 발생할 수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대의 망원경은 레이저 가이드, 장거리 영상 안정화 기술 등의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우주망원경은 지구의 대기를 거치지 않고 우주공간에서 직접 천체를 관측하는 망원경이다.

 

대표적인 우주 망원경으로는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 허블 우주망원경, 케플러 우주망원경, 스피처 우주망원경 등이 있다. 이들 우주 망원경은 지상 망원경과 달리 대기나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이미지의 흔들림 현상이 발생하지 않아 보다 정교하고 고화질의 이미지를 제공할 수 있다.

 

현대 망원경은 또한 더 긴 초점 거리와 더 정교한 광학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깊은 우주, 천체의 근접 지점까지 탐사할 수 있다. 또한 망원경의 이미지는 적외선, 자외선, 전파 등 다양한 파장으로 분석할 수 있어 천체의 화학적, 물리적 특성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갈릴레오의 위대한 업적

천문학

갈릴레오는 정확하지 않은 망원경 설명을 바탕으로 1609년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진 33배 망원경을 개선했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망원경을 개량하여 3030배 망원경도 만들었다. 그는 이 발전된 망원경을 통해 지구에서 보다 확대된 정확한 이미지를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소형 망원경과 같은 망원경이다.

 

그는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했다. 한동안 갈릴레오는 각각의 목적에 맞는 망원경을 제작하는 사람 중 하나였는데, 1609년 8월 25일 그는 첫 번째 망원경을 베네치아의 입헌군주들에게 설명했고, 그의 망원경 제작은 망원경이 무역업과 무역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에 유용하게 쓰인다는 것을 알게 된 상인들이 1610년 3월 갈릴레오는 '별에서 온 메신저(Sidereus Nuncius)'라는 제목의 소논문에서 그의 초기 망원경을 이용한 천문학적 관측을 발표하였다.

 

1610년 1월 7일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이용해 당시 그가 주장한 세 개의 별이 모두 목성에서 일렬로 나란히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너무 작아서 거의 보이지 않는 세 개의 고정된 별'에 대해 관찰했다. 그리고 다음 날의 관측을 통해 목성과 관련된 이 '별들'의 위치가 정말 고정된 별이라면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월 10일에 갈릴레오는 그 별 중 하나가 사라진 것을 지적했고, 관측을 통해 갈릴레오는 사라진 별이 목성 뒤에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만에 갈릴레오는 그 별이 목성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갈릴레오는 3개의 목성의 4개의 위성을 발견했는데, 이는 이오, 유로파, 칼리스토였다.

그는 또한 1월 13일에 네 번째 위성인 가니메데를 발견했다. 갈릴레오는 이 네 개의 위성에 그의 미래 후원자인 토스카나 공국의 군주 코시모 2세와 그의 세 형제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나중에 천문학자들은 갈릴레오 자신의 이름을 따서 갈릴레이 위성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작은 행성들이 주위를 돌고 있는 하나의 행성의 발견은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과 맞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천문학자와 철학자들은 처음에는 갈릴레오가 그런 별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갈릴레오는 18개월 동안 이 위성을 계속 관찰했고, 1611년 중반에 그 별의 주기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측정했다. 1610년 9월부터 갈릴레오는 달의 위상 변화(달의 크기가 변하는 모습)와 유사한 금성의 위상을 관찰했다.

태양계의 태양 중심적 모델은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발전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적 모델 - 금성의 초승달과 같은 위상만 관측이 가능하다고 예견한 모델 - 과는 반대로, 금성이 지구와 태양 사이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경우, 태양은 금성에 밝은 반구면을 만들고 이는 금성이 태양의 반대편에 있을 때 관측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금성이 태양의 지구 쪽에 있을 때는 지구에서 볼 수 없기 때문에 금성의 모든 위상을 관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반대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 모델은 금성의 초승달과 같은 위상만 관측이 가능하다고 예측했다.

갈릴레오의 금성 위상에 대한 관찰은 금성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태양 중심적 모델을 지지해 주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프톨레마이오스식 지구 중심 행성 모델을 반박했기 때문에 갈릴레오의 관찰은 매우 이상하게 여겨졌고, 이로 인해 17세기 대부분의 과학적 모임이 티코의 모델과 카펠라 모델과 같은 지구 중심 모델로 전환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갈릴레오는 또한 토성을 관찰하고 처음에는 토성의 고리가 세 개의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나중에 그리그가 토성을 관찰했을 때, 그는 토성의 고리가 지구를 향해 줄 지어있어 갈릴레오가 두 개의 고리가 사라 졌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1616년에 토성을 다시 관찰했을 때 그 고리가 다시 나타나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갈릴레오는 달 표면의 빛과 그림자 패턴에서 발견한 달의 산과 분화구에 대해 처음으로 발표한 사람이다. 그는 이러한 관찰을 통해 산의 높이를 계산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그는 달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완벽한 구형이 아니라 지구 표면처럼 거칠고 평평하지 않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갈릴레오는 이전에 불투명하다고 믿었던 은하수를 관찰하여 너무 밀집되어 있어 지구에서 구름처럼 보이는 수많은 별들의 무리를 발견했다. 그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많은 별들의 위치를 발견하기도 했다. 갈릴레오는 1612년 해왕성을 관찰했지만, 이것이 행성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특별한 인식도 하지 못했다. 그의 노트에는 표시할 수 없는 많은 희미한 별들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수학

갈릴레오는 수학적 발견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키노스코프(kinematic)이다. 이것은 물리적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 수학적 모델이다. 키노스코프는 물체의 움직임을 다루고 물체의 위치, 속도, 가속도 등의 수치 정보를 계산할 수 있다.

 

갈릴레오는 또한 기하학적 발견을 했다. 그는 터틀이라는 측량 도구를 개발하여 피사의 사각형과 같은 도형의 면적을 계산하는 데 사용했다. 이러한 발견은 과학 연구에서 정확한 측정과 수학적 모델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갈릴레오는 수학적 기술을 사용하여 태양 중심주의 모델을 확립했다. 이는 당시 지구 중심주의 모델을 대체하는 혁명적인 아이디어였다. 그는 태양 중심주의 모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각성에 관한 자료를 분석하고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를 계산하는 등 수학적 연구를 수행했다. 이러한 수학적 발견은 과학 혁명을 이끌었고, 현대 과학의 이해와 발전을 가져왔다.

 

1633년 가톨릭교회의 단죄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종신형에 처해졌으나 감형되어 가택연금에 처해졌고, 행동도 제한되었다. 또한 그의 모든 저서는 금서 목록에 올랐고, 1634년부터 피렌체 근교의 아르체트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다. 갈릴레이는 글쓰기에 몰두하여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설(1638년)을 완성했다. 그는 1638년 완전히 실명하고 탈장과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1642년 발열과 심계항진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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